이 개털같은 그릇안에…

어렸을적부터 나는 별 볼일이 없었다.
가정이 부유하지도 않았고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으며
가정 또한 예수를 믿는 가정도 아니었다.
학창시절에는 급우들에게 괴롭힘과 왕따도 심하게 당해서 삶의 소망이 없었다.

나는 교회를 어렸을적부터 다니면서 항상 부러운 대상이 있었다.
그 부러운 대상은 공부도 아주 잘했고 집도 유복했으며 믿음의 어머니가 있었다.
학생부에서뿐 아니라 교회내에서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만큼 믿음도 좋아보였다.
더 나아가 외모도 빼어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부러움의 대상은 수도권에 있는 대학을 모두 뿌리치고 우리나라 유명 기독교 대학에 진학을 했다.
그 대상은 어딜가든 칭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프랑스로 유학까지 가서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까지 잘하며
세상적으로도 지위가 있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보였다.
나중엔 목사님과 결혼을 해서 사모님이 되는 믿음의 엘리트코스를 밟았다.

나는 이상만 쫓았고 천성이 게을러서 젊은 날을 보내며 이렇다할 성취를 보이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가끔 그 부러운 대상을 생각하며 학벌의 열등감속에 빠져 진정한 보화는
미국의 아이비 리그인 브라운 대학이라 여기며 젊은 날을 살았다.

나는 내가 본다 생각했고 믿음이 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몸이 부서져라 헌신했고 주를 위한다며 열심을 냈으니 말이다.
아마도 열등감에 기인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그 동기였을 것이다 .
그렇지만 그러한 믿음은 어떤 생수 한 모금도 나에게 주지 못했고 마음의 혀를 서늘하게도 못했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어느 정도로 목이 마른지 모르는 영적인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마음속의 하나님은 나에게 노동착취만했지 그토록 부러움의 대상이 가졌던
세상의 영광을 조금도 주시지 않는 답답한 하나님이었다.
그렇게 그 부러움의 대상을 오랜 세월 부러워하고 동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며 어둠속에서 살았다.
나는 확실하게 하나님을 잘 믿고있는 열심있는 기독교 청년이라 생각했다.

그런 어리석은 나에게 하나님은 그 복음이라는 밝은 빛으로 찾아오셨다.
그 복음을 보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세상의 성취들이 부럽지 않았다.
진심으로 부럽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다며 인색한 하나님이라고 평생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은 세상에서 그 어떤 표현을 해도 부족한 그 복음을 내 마음에 심어주셨다.
이제는 더 이상 그 부러움의 대상이 부럽지 않다.
진심으로 말하지만 더 이상 부럽지 않다.
그리고 이제는 주께서 내 마음에 심어주신 이 복음이 너무 감사하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그럴듯한 성취보다 하나님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우리가 주목하였고 또한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어 우리가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시니라. 요한일서 1장 1~2절

나는 이제 더 이상 부족한 나를 보려하지 않으려한다.
세상의 성취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 자신은 속된말로 개털이지만
이 개털같은 그릇안에 그 복음이신 예수님이 담겨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우릴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성경은 그것을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애타는 사랑으로 우릴 찾아오셨다.

베드로에게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려 주신것이 예전에는 야속하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기 밑바닥을 봐야 그제서야 주님을 진실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나의 밑바닥을 보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보화로 오신 주님이 너무 감사하다.

부활이라는 사실로 당신 스스로가 영존하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리시고 마음의 손으로
그 생명의 몸을 만지게 하신 주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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