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모님,
딸들과 예전 사진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자는 동생에게 교회에 다니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했던 나,
그렇게 교만한 제가 또 교만한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또 교만하고 완고한 자녀들을 낳고 고집스럽고 완고한 네 사람이
부대끼고 싸우고 지지고 볶으면서 한 번 뿐인 인생을 보냈네요.
직장생활을 했던 저는 집에 돌아와 혼자서 아이들을 챙기는 것이 불만스러웠고
술먹는 남편이 못마땅했던 저는 저도 술을 즐기면서 남편보다 술을 덜 먹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로운척 하면서 남편을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대충 비슷해서 맞겠다 생각하고 결혼을 했는데 막상 결혼생활은
기쁨도 감사도 없는 전쟁터였지요.
그렇게 짙은 어둠에서 죄가 죄인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저희들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다가 사망에서 건지셨네요.
저는 시편이 지겨웠던 사람이였고 요한복음은 자꾸 아버지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해가 안되었던 사람이였고 계시록을 읽으면서는
어린양과 대주재 하나님의 등장이 혼란스러웠던 사람이였습니다.
목사님께 계시록을 많이 들어서 누가보면 계시록을 꽤뚫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아무리 암송하고 기록하고 읽고 읽어도 어린양과 대주재의 관계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성경읽는 종교인처럼 보였지만 제 마음은 참 암담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렇게 살던 저를 하나님은 때가 되어 그 복음으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그니라…하시면서요.
그 말씀 하나로 저는 그동안 이해되지않아 답답했던 모든 말씀들이 깨달아지고 믿어졌습니다.
제게 교회당에 다니자고 했던 여동생은 엊그제 울면서 전화가 왔네요.
언니, 나는 형부가 돌아가신게 너무 슬퍼서 매일 울어…
아버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형부가 너무 아까워…
저는 동생에게 그 복음을 선포할 기회가 또 주워졌습니다.
동생아, 형부가 네 남편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슬프니?
나는 네가 왜 그렇게 슬픈지 알아…그 복음을 몰라서야.
형부도 죽었고 나도 죽을거고 너도 죽는다.
인생은 들의 풀과 같은 존재야.
풀이 마르면 흔적이라도 있지 인간은 그냥 한 순간에 사라져.
그 복음은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신 것이고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거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신 것이 놀랍지 않니? 그게 말이나 되는 얘기니?
너도 마음으로 그 사실을 믿으면 영원히 사는거야.
사모님,
다른 얘기는 잘 들어도 그 복음만 선포되면 사람들은 싸~~해집니다.
동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채 가만히 있더군요.
설교를 보내줘도 듣지 않고 그 복음 편지를 보내줘도 읽지 않고…
오직 바쁘다는 것이 이유지만 실상은 진리에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어째서 영원한 생명에 이렇게도 관심이 없을까요?
교회가자던 동생은 아직까지 소경이고 저는 눈을 떴습니다.
이게 웬 은혜인지 감사하다는 정도의 표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또 한 해가 찾아왔네요.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시간 개념일 뿐 하나님은 천년이 하루 같은 날일 뿐입니다.
천년도 하루같이 짧은 우리네 인생에서 오직 영광의 아버지 하나님만
높임 받으시길 기도하는 밤입니다. 할렐루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
그가 또 피에 젖은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더라.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 19:13-14
내가 또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또 큰 천둥과도 같은 소리로 외치시를
“할렐루야! 대주재 하나님 곧 전능자께서 통치하시도다! 계 19:6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대주재 하나님 곧 전능자께 마음을 다해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 드림.